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이지애나 구입 (문단 편집) == 배경 == 이런 큰 영토를 한 번에 팔아넘기는 것이 일반적으로 순조로운 과정은 아닌데 그렇지 않은 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본래 루이지애나 지역은 스페인 탐험가 나르바예스(1528)와 [[에르난도 데 소토]]가 유럽인 최초로 찾은 곳으로 [[스페인 제국]]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근거로 이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그러다가 [[1683년]] 프랑스 탐험가 르네 로베르 카벨리에 드 라살이 [[일리노이]]에서 출발해 [[미시시피강]]을 따라 [[멕시코만]]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이곳을 [[루이 14세]]의 [[식민지]], 즉 루이의 땅이라고 “루이지앵”이라고 이름붙었고 나중에 미국식으로 “루이지애나”라고 불리는 기원이 되었다. [[1699년]], [[프랑스 해군]]의 드 이베르빌 [[제독]]이 정착지를 세웠고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당시 스페인은 이 지역을 프랑스에 넘겼다. 이후 루이지애나는 [[절대왕정]] 식민지 개척 시대에 [[프랑스 식민제국]]의 확장으로 차지한 땅 중 하나가 되었다. 거의 [[영국]]의 동부 해안을 제외하고 모든 북미를 차지하고 있던[* 물론 이게 깃발만 꽂고 점점점으로 개척촌을 세운 수준이긴 했다. 나머지는 모두 [[아메리카 원주민]]과 공존했다.] 프랑스령 루이지애나는 당시 프랑스의 북미 식민지인 누벨 프랑스(뉴 프랑스)의 이명으로 사용되었는데 여기에 뉴올리언스가 있는 오를레앙(올리언스) 지역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1763년]] [[7년 전쟁]][* 북미 [[전역]]을 [[프랑스-인디언 전쟁]]이라고도 한다.]의 결과로 [[북미]], [[인도]]에서 모두 철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평화조약에 따라 현재의 [[캐나다]] [[퀘벡]] 북쪽과 미시시피강 동부의 영토는 영국에게, 미시시피강 서부의 루이지애나 영토는 [[스페인]]에게 모두 할양했고 [[카리브해]] 도서지역을 빼고는 북미의 모든 식민지를 포기했다. 그런데 이후 [[나폴레옹 전쟁]] 와중 [[1800년]] 나폴레옹이 [[스페인]]과의 산 일데폰소 조약을 통해 [[미시시피강]] 서부의 옛 루이지애나 영토를 다시 빼앗았다. 미국은 스페인에 이어서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갓 독립한 미합중국 옆에 자국 영토와 비슷한 크기의 프랑스 식민지가 등장한 건 신생국인 미국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당장 [[미시시피강]]에서 흙 파먹고 살던 농민[* 특히 신생주인 [[켄터키]]와 [[테네시]]. 그 이남의 하류지방은 아직 주가 없었다.]들이 물 등을 위해 루이지애나의 뉴올리언스 근교를 지나며 통행세를 내야 되는 상황에 처했다. 그 정도면 좀 괜찮은데 남부의 농업 교역에 미시시피강 수운이 필수적이었다는 점이 더 치명적이었다. 뉴올리언스를 비롯한 프랑스령 식민지가 미시시피강 하류를 정확히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 상황에서 만약 프랑스가 미시시피강을 봉쇄했다간 남부가 의존하는 수운은 끝장이었다.[* 참고로 프랑스가 넘겨받기 직전 루이지애나를 통치했던 스페인은 [[1795년]] 미국과 핑크니 조약(Pinckney's Treaty)을 체결하여 미국-스페인 양국간 하천의 항해를 보장하고 통상을 정지하지 않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미시시피강에 대한 의존은 [[남북전쟁]] 때까지도 여전해서 북부 연방이 미시시피강 하류를 봉쇄하자 남부동맹의 해외 무역 90% 이상이 막혔다.] 그래서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여기의 교역권이나 협상하자고 사람을 보냈는데[* 근데 이 부분부터가 제대로 따지면 전쟁으로 갈 시비의 여지가 큰 부분이라 살짝 협박성에 가깝다. 그쪽 항구 지역 통행세 내는 게 거슬렸던 미국에서 일단 통행 허가를 요구한 것이다. 눈치 빠른 나폴레옹은 가뜩이나 루이지애나 주변 영국 식민지 때문에 거슬렸기도 하고, 프랑스가 가장 많이 지원했으며 독립전쟁으로 사이가 매우 좋아진 미국과 이 일로 사이가 틀어질까봐 우려했다고 분석된다.] 정작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덜컥 그냥 '''"차라리 그 땅 전체를 다 사는 게 어떰?"'''이라는 식으로 나섰다. 땅 크기만 보면 나폴레옹이 정신줄을 놓았나 싶지만 나폴레옹에겐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들이 있었다. 대혁명 이후 계속 전쟁을 치르던 나폴레옹으로서는 북미 영국 식민지로부터의 침략 위협도 많고 당시 프랑스 식민지에서 일어났던 [[아이티 혁명]]까지 부담스러운 일이 마구 터지고 있었다. 당장 [[영국 해군]]의 함대 때문에 [[프랑스군]]을 아이티 등 카리브 식민지에 파견하는 것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이지애나가 아무리 큰 잠재력을 가진 땅이라지만 무역항인 뉴올리언스 정도를 제외하면 당장 나오는 이익도 별로 없는 마당에[* 현대에 와서야 기술의 발전으로 풍부한 지하자원이나 농업, 목축업, 공업 외 각종 산업으로 먹고 살기 좋은 동네지만(특히 미네소타는 상당히 부유한 편이다) 당시엔 저 드넓은 땅이 거의 초원이거나 산맥이었다. 저 지역의 주들이 유독 크고 경계도 단순한 것이 당시엔 이정표로 삼을 만한 도시가 없어서 그냥 쭉쭉 그어서 경계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 정부]]는 루이지애나 구입 이후 크게 늘어난 영토를 개척하기 위해 정착민들에게 엄청난 크기의 땅을 헐값에 분양했는데 소설 [[초원의 집]]을 보면 미개척지에서 버티는게 얼마나 헬인지 잘 묘사되어있다. 많은 경우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초원에 [[오두막]] 짓고 가족들이 혼자 버텨야 했으며 중서부 특유의 괴랄한 환경(회오리 바람, [[눈보라]], [[우박]], 병충해 등) 때문에 한 순간에 1년 농사가 날라가기도 하며 [[읍]]에 산다고 해도 교통 상황이 열악해 [[마을]] 전체가 고립되기도 했다. 그나마 미국은 동부에서 [[농부]]들을 끝없이 보내 인구빨로 개척해낸 거지만 본국이 [[대서양]] 너머인 프랑스가 저 드넓은 미개척지에서 이익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유지비]]는 크게 드는 등 제대로 손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뉴올리언스를 비롯한 미시시피강 하구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역에 대한 탐사도 제대로 되지 않아서 이 지역에 대한 정보는 미국이 구입한 뒤인 메리웨더 루이스와 윌리엄 클라크의 탐사 뒤에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위에서 말한 대로 군사적 효용은 컸지만 정작 당사국인 미국은 프랑스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으므로 당장은 큰 효용을 발휘할 수도 없었다.[* [[문명 시리즈]] 게임을 해 본 사람들이라면 '언제든 적의 손에 넘어갈 수 있는 건너 대륙의 점령 도시를 우호적 문명에게 싸게 팔아치워 우호도도 올리고 이익도 취한 후 신경 꺼 버리는' 플레이를 종종 했을 텐데 정말이지 역사적인 현실과 거의 같은 플레이를 한 거다. 알래스카도 이와 비슷하게 얻은 거다.] 게다가 프랑스 본토에서는 이 멀리 떨어진 땅을 가지고 투기했다가 [[미시시피 거품]]이 터지면서 경제가 박살날 위기에 처했으며 이미 루이 14세의 땅이라는 루이지애나는 프랑스 본토 사람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식민지가 아니라 내 삶을 망친 혹덩이가 된 지가 오래였다. 그의 [[루이 16세|내손]] 모가지를 단두대로 내친 마당에 그게 제값을 받을리도 없기 때문에 돈이라도 될 때 팔아버리는 게 나폴레옹 입장에선 중요한 문제였다. 즉 처음에는 스페인으로부터 새롭게 돌려받은 영토로 프랑스의 확장을 꿈꿨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자 3년 만에 접었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미시시피강의 해운에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뉴올리언스에 군대를 파견했지만 중간에 [[아이티]]에서 예상 외의 손실을 입고 계획을 수정할 상황이 되었다. 본토에서 거리도 멀고....] 토마스 재퍼슨은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당시 [[나폴레옹 전쟁]]이 유럽 전체로 점점 퍼져나가던 상황을 고려하면 이는 나폴레옹의 몇 수 앞을 내다본 전략적 판단이었던 셈이다. 후세에 역사책을 보고 단순히 땅 크기의 문제로 생각하면 나폴레옹이 이해가 잘 안 될 수 있지만 어차피 나폴레옹이 계속 소유했어도 패전 후 다시 영국, 미국 등에 제 값도 받지 못하고 할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나폴레옹도 훗날 [[세인트헬레나]]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어차피 가지고 있어봤자 영국에게 빼앗길 텐데 그냥 판 거다"라고 밝혔다. 실제로 스페인과 프랑스가 대조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당시 스페인은 [[카리브]]의 [[쿠바]], 그리고 [[아시아]]의 [[필리핀]]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스페인한테는 거꾸로 미국이 쿠바의 매각을 제안했지만[* 미국도 이를 기대하고 사절단과 구매금액까지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상 아메리카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쿠바를 포기할 수 없었던 스페인은 이를 거절했고 이후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결과적으로는 쿠바와 멀리 아시아의 필리핀까지 죄다 뺏기고 [[스페인 제국]]은 몰락해 버렸다.[* 그러나 미국도 필리핀은 현지의 저항을 물리치고 식민지로 만들었지만 정작 본인들이 원했던 쿠바는 먹지 못했다. 당시 미국은 국력이 지금만큼 강하지 않았고 유럽 국가들의 힘이 아직은 강했으므로 유럽 열강들의 견제를 우려해서 눈치를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쿠바는 [[독립]]을 시키되 [[속국]]으로 만들고 [[관타나모만]]을 영구조차하는 선에 그쳤고 그 대신 얻은 곳이 [[푸에르토리코]].] 당시 스페인 상태로도 많이 투자를 했어도 도저히 지금 국력 상태로는 나라를 먹이고 살리기 바쁜 상태에서 필리핀까지 관리하기란 힘들었고 오히려 매각을 했다면 그 돈으로 스페인 재정에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나폴레옹은 처음에 1억 프랑(2천만 달러)을 불렀지만 중개를 맡은 런던 [[베어링스 은행]](Barings Bank of London)과 호프스 오브 암스테르담(Hopes of Amsterdam) 두 은행은 [[프랑스 정부]]를 설득하여 해당 영토에 대한 요구 가격을 8000만 [[프랑스 프랑]]으로 낮추었고 최종적으로는 1,500만 금달러(7,500만 금프랑)로 낙착되었다. 대금은 미국 정부 채권으로 지급되었으며 나폴레옹은 대금으로 받은 채권을 즉시 두 은행에 액면가의 86.5% 가격으로 넘겨 현금을 마련했다. 두 은행은 받은 채권을 [[런던]]과 [[암스테르담]]의 일반 투자자들에게 다시 판매했다. [[야사(역사)|야사]]에 따르면 나폴레옹이 이 매각서류에 서명하면서 '''"이것으로 미국은 영국에겐 해양에서 가장 강력한 상대가 될 것이며, 결국 영국은 머지않아서 그 오만한 머리를 미국에 숙이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제2차 세계 대전|결국 140년 뒤에 현실이 됐지만 이때는 영국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의 조국인 프랑스를 포함한 전 유럽이 미국에 머리를 숙이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